“싫어, 오지 마...”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빼는 너도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워. 뺨에 손을 대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너의 떨림이 나의 손을 통해 전해져 온다. 아아, 떨고 있는 너는 마치 비 맞은 아기고양이처럼 애틋하고 연약하구나. 부디 떨지 말길.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나의 연인.
“울지 마.”
안심시키기 위해 너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자 너는 새된 목소리로 울었다. 내가 곁에 있는데도 이렇게 불안에 떨다니. 얼마나 괴롭힘을 당한 걸까. 얼마나 혼자 슬퍼했던 걸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를 아프게 했던 그 인간들이 떠오른다.
감히 인간 주제에 너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죽이려고 했지. 날 다시 만나 기뻐하고 있을 뿐인 네게 그 더러운 칼날을 들이대다니.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역시 그때 단숨에 죽이는게 아니었어.
“내, 보내 줘...”
상냥한 아이. 너를 죽이려고 한 인간들에게 조차 가엾음을 느끼고 만나러 가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런 놈들은 네가 생각해줄 가치조차 없는 놈들이니까.
“언제까지나 내가 지켜줄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래. 실수는 두 번 하지 않아. 널 홀로 두고 떠난 내가 멍청했어. 이제 그딴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야.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는 너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밤의 커튼이 드리워진 하늘보다도 검고 하늘에 수놓아 있던 별보다도 반짝였던 아름다운 흑발이, 지금은 마치 모든 것을 덮어버린 설원과 같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가엾게도. 얼마나 무서웠으면.
하지만 상관없어. 검은색의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하얀 너도 그에 못지 않게 무척 아름다우니까.
“사랑해. 블러디.”
그렇게 사랑을 속삭이자 너의 떨림이 조금 멈췄다. 이제야 안심이 되는가 보구나. 귀여워. 웃으며 네 눈꼬리에다 입술을 맞췄다.
블러디의 눈꼬리에 맺혀있던 액체는 짭짤한 맛이었다.
* * *
병의 징조는 분명히 있었다. 몸이 이상하게 나른하거나 혈기가 마음대로 사용되지 않는 정도의, 그냥 피곤으로 넘어갈만한 증상이었다. 병의 징조란 그렇게 사소한 법이다. 특히 병이 깊으면 깊을수록, 야속하게도 병의 징후는 더욱 단순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침이 많아졌지만 그냥 감기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저 피로가 겹친거라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혈기를 다루기 힘들어 졌지만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결국 새카맣던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자, 로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병에 걸린 건지, 왜 병에 걸린 건지, 치료하는 방법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로드가 알게 된건, 이 병은 체력과 마력을 좀먹을 뿐만이 아니라 발병자의 기억까지도 좀먹어 간다는 사실 하나였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게 병의 진행이 빨라진다는 신호였는지, 로드는 점차 잊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만나왔는지, 자신이 어떻게 마법을 썼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굴 사랑하고 있는지 조차도 전부 다.
“잊고 싶지 않아...!”
로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구하기 힘들다는 재료는 전부 구해보고 몇 없는 지인들의 의견을 들어 여러 약을 지어봤지만 점차 병의 진행을 늦추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책을 읽다가도 자기가 어째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순간 잊어버렸다가, 겨우 다시 기억해내자 공포가 로드의 몸을 뒤덮었다. 로드는 발작을 일으키듯 들고 있던 책을 던져버렸고,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잡히는대로 던지며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주위를 닥치는 대로 부숴버린 뒤, 로드는 주저앉아 흐느꼈다. 자신의 추억을 전부 빼앗아가는 병을 원망하고 이런 병에 걸린 현실을 거부하며, 결국 자기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아이올로스...”
로드는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사람. 자유로운 바람. 그나마 기억하는 추억 속에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구멍 난 것처럼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하,하하... 아하하... 이젠, 네가 와도 네가 맞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어...”
허탈하게 웃는 로드의 눈에서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렇게 로드는 웃으면서 울었다. 마치 망가져버린 인형처럼 웃는걸 멈추지 않았다. 인형의 태엽이 풀리듯, 모든 체력을 다 쓰고 기절해 버릴 때까지, 미쳐버린 로드의 웃음소리가 어둑한 성 안에서 메아리 쳤다.
* * *
눈을 뜬 소년은 잠시 동안 눈꺼풀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꿈이었다. 깊은 숲 속에는 커다란 성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성 안에는 어느 사람이 미친 듯이 웃는 꿈이었다.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고민해봤지만 자신에게 그런 고민은 소용 없다는걸 잘 아는 소년은 고개를 젓고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주위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빛이 눈을 찌름과 동시에 시원한 저녁 바람이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소년의 하얗고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매만지고 지나갔다.
“...아이올로스...”
바람을 느끼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그 단어에 소년은 놀랐다. 어쩐지 낯익은 단어. 분명 꿈속에서 봤던 사람도 이 단어를 중얼거렸다. 혹시 그 사람은 과거의 나 자신인걸까?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확신이 들지 않았다.
소년에겐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마저도 기억하지 못했다. 소년이 눈을 떴을 땐 절벽 아래에서 쓰러져 있었다. 대체 자기가 왜 여기에 쓰려져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자기 이름이 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주변의 마을에 들렀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소년을 보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괴물, 괴물이다!!!’
‘흡혈귀야!! 우릴 잡아먹을 거야!!’
‘당장 꺼져 이 괴물!!!’
쫓겨난 소년은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결국 소년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커다란 검은색 천으로 몸을 두르고 발걸음이 옮기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돌아다니는게 위험하다는 지식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소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나 어쩐지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멀리 떠나 있다고 느껴졌다. 그게 누구인지, 정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바람을 따라가면 만나지 않을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떠돌아다닌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그 사람에 대한 단서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알아낸 건 아무래도 자기는 흡혈귀라는 종족인 것 같다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는 다는 사실 이 두 가지 뿐이었다.
“... 밖에 소란스럽네.”
지금 숙소를 잡은 마을은 외진 곳에 있어 늘 조용한데 오늘따라 밖에 소란스러웠다. 창문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음식을 소쿠리에 가득 담아 마을 중앙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뭔가 축제라도 있는 걸까.
평소에는 배척받을까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꺼려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살짝 고민하던 소년은 옷걸이에 걸려있던 로브를 집었다. 밤이 되면 주변이 어두워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들테고 몸을 로브로 가리고 다니니까 사람들과 살짝 떨어져 있으면 소년의 정체를 들킬 위험도 줄어든다. 그러니 괜찮겠지.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다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갔다.
“블러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이올로스는 절망하듯 힘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로드의 성으로 돌아온 아이올로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의 성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평소 로드가 즐겨 관리하던 꽃도, 로드가 귀여워하던 동물도, 아이올로스가 돌아오면 웃으며 맞이해주던 로드조차 없었다.
성 안은 마치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가구는 부서지고, 책은 전부 찢겨나가 있었다. 특히 로드가 쓰던 연구실은 가장 처참했다. 모든 약병은 부서지고 주변 벽은 검게 변색된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남아 있는 종이에는 절망에 가득 찬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로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한 아이올로스는 그 즉시 그를 찾아다녔지만 그에 대한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마을마다 검은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흡혈귀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봤지만 너도나도 할 거 없이 흡혈귀를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이상한 말을 들었다.
‘검은 흡혈귀는 보지 못했어도 하얀 흡혈귀는 봤었지. 물론 모두가 힘을 합해 쫓아내 버렸지만.’
로드의 머리카락은 밤하늘과 같은 검은색. 흰색의 머리카락이면 그일 리가 없다. 아이올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흡혈귀를 봤다는 마을을 전부 돌아다녀봤지만 로드로 보이는 흡혈귀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식사도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않고 로드를 찾아다닌 지 수개월 째. 이젠 날을 세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아이올로스는 내일 일찍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 대충 빵 한 조각을 입 안에 쑤셔 넣고 조금이라도 숙면을 취하려고 했지만 멀리서 들리는 음악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 블러디가 좋아하던 음악...”
딱히 드문 음악은 아니다. 축제에서 자주 쓰는 음악이란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개월 째 로드에 대한 단서 하나 잡지 못했던 아이올로스에겐 그 음악은 로드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였다. 아이올로스는 마치 그 음악에 홀린 것처럼 음악이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축제는 제법 성대한 편이었다. 마을 어귀에 큰 모닥불을 피우고,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달콤한 와인을 마시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불렀다.
축제를 좋아하는 아이올로스의 평소 성격이라면 사람들 무리에 들어가 즐겁게 축제를 즐겼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이런 축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사람들이 마시라며 준 달콤한 와인조차 텁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멍청하긴... 여기에 블러디가 있을 리 없는데.”
음악에 이끌려 온 자신을 비웃으며 아이올로스는 컵안에 있는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이 이상 여기에 있어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아이올로스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그 때 아이올로스의 눈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틀림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자기가 잘못 볼 리가 없으니까. 아이올로스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무에 기대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가슴의 고동은 더욱 커지고 아이올로스의 어둑했던 붉은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소년이 아이올로스가 다가온걸 눈치채고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았다. 소년의 눈동자를 본 아이올로스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소년을 끌어안았다.
“블러디...!!!”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소년이 아이올로스를 떼어내려는 듯 바둥거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소년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뺨을 부비댔다.
“블러디, 블러디!! 아아,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드디어 너를 다시 끌어안게 되다니...!! 대체 왜 갑자기 사라졌던거ㅇ...”
소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머리카락에 대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떼고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듯이 잡자, 소년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완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밤하늘처럼 새까맣던 로드의 머리카락은, 마치 설산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아이올로스는 어째서 로드에 대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흡혈귀에 대한 단서는 찾지 못했지만,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흡혈귀의 목격자는 많았다. 그리고 그 하얀 흡혈귀는 전부 로드를 가리키고 있던 거였다. 아이올로스는 로드의 머리카락 색이 변해버린걸 몰랐기 때문에 그 하얀 흡혈귀가 로드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게 문제였다.
“아, 아아... 미안해. 설마 네 머리카락이 변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정말 멍청했네.”
“당신, 누구...”
“이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화났어? 미안해 블러디. 이렇게 늦게 찾다니 네가 화나는게 당연하지.”
“... 나를 알...”
꺄아아아악-!!!!!
귀가 찢어질 정도로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들리자 로드는 그제야 자기를 가리고 있던 검은 로브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걸 알아챘다. 로드를 본 마을사람 중 한 명이 그가 흡혈귀란걸 알고 비명을 지른거였다. 웅성거리는 마을사람들의 목소리에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를 죽이려는 듯 저 멀리서 무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로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 도, 도망쳐야...!”
“블러디 네 얼굴을 제대로 보여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잖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큰일난다구!”
“미안해. 아직 화가 안 풀렸지? 그래도 도망친다는 말은 하지 마... 네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응?”
“아...!”
주위 사람들의 살기와 공포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아이올로스는 로드의 뺨을 매만지며 사랑이 가득한 눈동자로 말할 뿐이었다. 로드는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는 눈앞에 있는 그도 위험했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아도 해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하면 용서 없이 죽이려 드는 종족이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어떻게든 그를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자기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하려는 순간, 자기들 쪽으로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마을사람이 시야에 들어왔고, 로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
“이 괴물, 죽어라!!!”
“...”
분명 도끼가 몸을 내려찍었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질 않았다. 의아함에 로드가 눈을 뜨자 도끼를 든 남자가 마치 석상처럼 눈앞에 굳어 있었다.
“...?!!”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남자의 양쪽 눈 밑에 검은 실선이 대각선 방향으로 생겨났다. 금이 간 머리 윗부분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잘린 사과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남자의 팔, 다리, 몸통까지 온갖 선이 그어지더니 퍼즐조각처럼 몸이 동강나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더니 바닥을 피로 흥건하게 적셨다.
“으아아아아악!!!!”
사람이 토막나 죽자 마을사람들의 비명이 겹쳤다. 로드 역시 눈앞에서 일어난 참상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되게 시끄럽네...”
단 한 사람, 이 참상을 만들어낸 본인을 제외하면.
“겨우 블러디를 만났는데 시끄럽게 떽떽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감히 죽이려고 해? 쓰레기 같은 인간주제에.”
아이올로스가 로드를 끌어안으며 말하자 로드는 겨우 알 수 있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남자를 지금 이렇게 바닥에 흩어진 퍼즐조각처럼 토막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자길 끌어안고 있는 이 사람이란 사실을. 구토가 올라올 것 같은 잔인한 상황임에도 아이올로스의 표정에는 죄책감 따위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는 분노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올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한 산들바람이라 생각했지만 누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른 사람의 팔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자 산들바람은 점차 세기가 강해지더니 이윽고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움으로 마을 사람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내, 내 팔!!”
“꺄아아악-!!! 여보, 여보!!!!”
“싫어, 살려줘!!!!”
바람의 칼날은 덮친 마을사람들의 몸을 무자비하게 조각냈다. 대지를 가를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은 사람들의 사지와 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단번에 죽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과 공포가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살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지만 바람에게서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죽음 뿐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스며 있던 비명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사람들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침내 남은 신음소리도 멈추자, 조용해진 외곽에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아, 이제야 조용해졌네. 그럼 블러디, 돌아갈까?”
“아, 아아...”
로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이올로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였으면서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그에게 있어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냥 벌레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망쳐야해. 도망쳐야해.
로드의 본능이 소리쳤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자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저 한 마을의 인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인 이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싫어! 이거 놔!! 싫어어!!!”
“블러디! 제발 내 말을 들어줘!!”
“싫어!! 난 너 같은거 몰라!! 무서워!! 무섭다고!!”
“무슨 바보같은 말을 하는거야!! 나야, 아이올로스!! 네 연인!!”
“놔, 이거 놔!!!!”
로드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아이올로스를 거부하자, 아이올로스의 이성이 흔들거렸다.
겨우 찾았는데, 겨우 찾았는데. 대체 왜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거야?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로드를 바라보던 아이올로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를 놓칠 수 없었다. 여기서 놓치면 자긴 또 로드를 찾아 헤매야 한다. 로드가 없는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그런 지옥을 또 맛보게 하려는거야?
“... 절대로, 놓지 않아...”
“아, 아아...!”
아이올로스의 얼굴에 검은 빛이 드리워졌다. 그 표정에선 분노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미안해. 조금만 자고 있어.”
“컥..!”
아이올로스의 주먹이 로드의 배를 강타했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이 아이올로스의 주먹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드의 몸이 무너지듯 앞으로 고꾸라지자 아이올로스는 그런 그를 받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기절한 로드를 바라보는 아이올로스의 표정에서 점차 검은빛이 사라졌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그렇게 말하며 아이올로스는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고깃덩어리 몇 개가 발에 채이자 귀찮다는 듯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러고 보니 로드를 봤다는 마을 놈들도... 블러디를 죽이려고 했었지? 가만 둬선 안 되겠네.”
감히 바람의 신의 반려를 건들다니. 인간 주제에 너무 건방지잖아? 안 그래 블러디?
아이올로스는 웃으며 기절한 로드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대답을 구했지만 그의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는지 아이올로스는 그저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미쳐버린 바람의 신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색 발자국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