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오블]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어.
‘누구를?’
- 모르겠어. 하지만 만나고 싶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 그렇지만 그 사람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 이유는?’
- ...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건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고 믿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어. 심연에 침식된 바다 속에서 건진 기억의 조각 속에 남은 감정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니까. 대체 누구인지, 왜 이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지금은 이 조각만이 내 이정표야.
오블리비언은 주위에 들리던 원소의 속삭임에게 대답했다.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땐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려해도 기억은 벌레가 먹어 구멍난 책처럼 제대로 된게 없었다.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기억 중 쓸만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이름과, 어느 원소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문에 대한 지식 뿐. 남아있는 기억으로 잊어버린 부분을 추측해 보려 해도 발작이 멈추지 않는 어비스의 침식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소란스럽게 말을 거는 원소들의 속삭임이 방해돼 제대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오블리비언은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알아낼 수 있도록 이동하는게 더 유용하겠다고 판단, 막무가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도 애매한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르나, 오블리비언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변이 위급해질 경우에는 마법을 사용하면 된다. 원소의 흐름을 운용하는 법은 숨 쉬듯 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옆에서 시끄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알려주고 있으므로 잊어버릴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떠돌던 오블리비언은 그날 지낼 여관의 주인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산 위쪽의 동굴에는 햇빛이 잘 닿지 않아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이 있어 겨울에도 얼음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먹던 식사를 계속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달랐다. 녹지 않는 얼음. 그 말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각나 있던 기억 중 하나가 떠올랐다.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하얀 ‘누군가’에 대해서. 어째서인지 그 ‘누군가’ 는 오블리비언 자신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블리비언은 서둘러 그 얼음이 있다는 동굴로 갈 채비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감각만 믿는 오블리비언을 비웃듯이 원소들이 말을 걸었다. 그럴 만 했다. 오블리비언 자신조차도 자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그저, 가고 싶을 뿐이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동굴답게 안의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추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감각까지 드는걸 봐선 과거 자신은 추운 곳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만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오블리비언은 그 장소를 떠나기 싫었다. 떠날 수 없었다. 그저 녹지 않는 얼음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
이터널이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가 얼음동굴에 관해 묻고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한건 그 마법사가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 동굴은 딱히 마력이 고이는 장소도, 가치있을 보석이나 광물 등이 있을 만한 장소도 아닌 그저 평범한 얼음동굴이므로 마법사가 오래 머무를 장소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관광용으로 한번 들렀다 갈 수준이다. 그래도 이터널은 그 동굴을 향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나마 오블리비언일 가능성이 있는 정보라면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동굴 앞에 다다르자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겨울의 낮은 기온과 합쳐진 바람은 일반인이라면 추워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이터널에게 있어 이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아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갈수록 추위는 더해졌고, 마침내 홀처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얼음 사이에 앉아있는 검은 소년이 이터널의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 대신 기능하는 어비스의 박동이 빨라졌다. 빠른 걸음으로 검은 소년에게 다가가자, 이터널의 기척을 느낀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이터널은 이 소년이 오블리비언이라고 확신했다. 붉은 눈동자가 심연처럼 검은눈이 되었고, 감정 풍부했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무표정의 얼굴이었지만 틀림 없었다. 이터널이 그렇게나 찾아다니던 오블리비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터널은 말없이 오블리비언을 끌어안았다. 오블리비언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정작 그를 직접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저 이터널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오블리비언이 환상이 아니라는걸 확신하기 위해 그를 강하게 끌어안는 것 뿐이었다.
***
아, 이 사람인가 봐.
‘뭐가?’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 날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왜 그렇게 생각해?’
- 그건...
이젠 거의 남지 않은 기억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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