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오블] 만나고 싶어

[이터오블] | 2019. 11. 3. 23:19
Posted by 피넬

-만나고 싶어.

 

누구를?’

 

- 모르겠어. 하지만 만나고 싶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 그렇지만 그 사람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 이유는?’

 

- ...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건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고 믿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어. 심연에 침식된 바다 속에서 건진 기억의 조각 속에 남은 감정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니까. 대체 누구인지, 왜 이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지금은 이 조각만이 내 이정표야.

 

 오블리비언은 주위에 들리던 원소의 속삭임에게 대답했다.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땐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려해도 기억은 벌레가 먹어 구멍난 책처럼 제대로 된게 없었다.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기억 중 쓸만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이름과, 어느 원소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문에 대한 지식 뿐. 남아있는 기억으로 잊어버린 부분을 추측해 보려 해도 발작이 멈추지 않는 어비스의 침식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소란스럽게 말을 거는 원소들의 속삭임이 방해돼 제대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오블리비언은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알아낼 수 있도록 이동하는게 더 유용하겠다고 판단, 막무가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도 애매한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르나, 오블리비언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변이 위급해질 경우에는 마법을 사용하면 된다. 원소의 흐름을 운용하는 법은 숨 쉬듯 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옆에서 시끄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알려주고 있으므로 잊어버릴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떠돌던 오블리비언은 그날 지낼 여관의 주인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산 위쪽의 동굴에는 햇빛이 잘 닿지 않아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이 있어 겨울에도 얼음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먹던 식사를 계속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달랐다. 녹지 않는 얼음. 그 말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각나 있던 기억 중 하나가 떠올랐다.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하얀 누군가에 대해서. 어째서인지 그 누군가는 오블리비언 자신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블리비언은 서둘러 그 얼음이 있다는 동굴로 갈 채비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감각만 믿는 오블리비언을 비웃듯이 원소들이 말을 걸었다. 그럴 만 했다. 오블리비언 자신조차도 자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그저, 가고 싶을 뿐이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동굴답게 안의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추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감각까지 드는걸 봐선 과거 자신은 추운 곳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만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오블리비언은 그 장소를 떠나기 싫었다. 떠날 수 없었다. 그저 녹지 않는 얼음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

 

 

 이터널이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가 얼음동굴에 관해 묻고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한건 그 마법사가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 동굴은 딱히 마력이 고이는 장소도, 가치있을 보석이나 광물 등이 있을 만한 장소도 아닌 그저 평범한 얼음동굴이므로 마법사가 오래 머무를 장소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관광용으로 한번 들렀다 갈 수준이다. 그래도 이터널은 그 동굴을 향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나마 오블리비언일 가능성이 있는 정보라면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동굴 앞에 다다르자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겨울의 낮은 기온과 합쳐진 바람은 일반인이라면 추워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이터널에게 있어 이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아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갈수록 추위는 더해졌고, 마침내 홀처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얼음 사이에 앉아있는 검은 소년이 이터널의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 대신 기능하는 어비스의 박동이 빨라졌다. 빠른 걸음으로 검은 소년에게 다가가자, 이터널의 기척을 느낀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이터널은 이 소년이 오블리비언이라고 확신했다. 붉은 눈동자가 심연처럼 검은눈이 되었고, 감정 풍부했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무표정의 얼굴이었지만 틀림 없었다. 이터널이 그렇게나 찾아다니던 오블리비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터널은 말없이 오블리비언을 끌어안았다. 오블리비언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정작 그를 직접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저 이터널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오블리비언이 환상이 아니라는걸 확신하기 위해 그를 강하게 끌어안는 것 뿐이었다.

 

 

 

***

 

 

, 이 사람인가 봐.

 

뭐가?’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 날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왜 그렇게 생각해?’

 

- 그건...

 

 

 

이젠 거의 남지 않은 기억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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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올뱀로] 버려진 아이

[아올뱀로] | 2019. 11. 3. 21:35
Posted by 피넬

 폭풍의 언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서풍이 불 때 태어난 아이는 검소하고 적이 없는 인생을 살고 남풍이 불 때 태어난 아이는 사치스러우며 많은 동료들이 따를 것이다. 북풍이 불 때 태어난 아이는 뛰어난 전투능력을 지닌 전사가 되고 동풍이 불 때 태어난 아이는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태어난 아이는 바람의 신이 될 운명이다. 전설의 마지막 문장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폭풍의 언덕은 그 이름답게 바람이 잠잠한 날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누구도 믿지 못할 현실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사는 젊은 부부의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폭풍의 언덕은 마치 그 탄생을 기다리는 듯이 늘 강하게 불던 바람을 잠시 죽였다. 언제나 바람이 불던 장소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적. 들리는건 잔잔한 바람소리가 아닌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 진통이 시작된 임산부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 수 시간이 흐른 후, 아이의 울음소리가 마을 안에 울려 퍼지자 마치 그 탄생을 기뻐하듯이 폭풍의 언덕에 다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태어난 아이는 바람의 신이 될 것이다. 그 전설을 믿고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이올로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걸음마보다 바람으로 타고 다니는 마법을 먼저 익혔고, 글자를 깨우칠 무렵 쯤 익힌 주문은 마을의 청년 마법사와 맞먹을 수준이었다. 아이의 부모와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되면 마을을 지켜줄 수호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이올로스가 자라 친구들과 어울려 놀 나이가 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아이올로스와 놀던 아이 중 한 명이 고열에 시달렸다. 처음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올로스와 함께 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병이 나거나 크게 다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열병으로 시작하다 목숨이 위험할 수준의 병으로 번지거나, 단순히 넘어지기만 했을 뿐인데도 팔다리가 부러지는 등,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함이 퍼질 무렵, 아이올로스의 부모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확신했다. 아이올로스는 바람의 축복을 받은게 아니라 저주를 받은 거라고.

아이 몰래 모인 어른들은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가다간 마을이 멸망할지도 모르니, 저 아이를 먼 곳에 데려다가 버려야겠다고. 처음엔 죽이자는 말도 나왔지만 아이는 이미 상당한 마법실력을 가진데다, 바람의 저주를 받은 아이에게 직접 위해를 가했다간 어떤 재난이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 버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태어날 때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던 아이올로스는, 그렇게 마을에서 버려지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웬 상자에 갇혀 있었고, 뚜껑을 열고 나오니 본 적도 없는 숲 속이었다. 처음엔 바람을 타고 마을로 돌아가려 시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에는 돌아올 수 없는 저주가 걸려있단 사실을 알아챘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머리가 좋을 지라도 아직 아이올로스는 어린 아이였다. 와본 적도 없는 곳, 거기다 주변 마력의 흐름을 보아 강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장소. 식사라고는 어제 먹은 빵 한 조각이 전부라 배도 고팠다. 나름 지식을 모아 먹을 수 있는 열매나 풀을 찾으려 했지만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이라 변변한 나무 열매 하나 찾기 힘들었다. 하루종일 숲을 돌아다닌 탓에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간 아이올로스는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그 옆에 누웠다.

 아이올로스는 이대로 있으면 탈진해서 죽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측했다. 하지만 아무리 앞날을 예측한다 해도 어찌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여기에 누워 탈진해서 죽느냐, 조금 더 움직이다 마수에게 잡아먹히냐, 기껏해야 그런 차이일 뿐이었다. 지친 몸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웠고, 불을 쬐고 있지만 손 끝이 조금씩 차가워 지는게 느껴졌다. 점차 눈꺼풀도 무거워지는걸 느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뜨려고 노력했지만, 지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주변의 추위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모닥불의 열기와 다른 열기였다. 진한 피의 향도 느껴지는걸 봐서는 마수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먹이를 찾아 온 것 같았다. 최소 어떤 마수인지 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에 아이올로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 눈앞에 서있는 그림자를 올려보았다.

 

 흉악한 마수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붉은색이 눈앞에 있었다.

 

 검은 박쥐와 늑대형 마수를 거느린, 피보다 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있던 아이올로스가 그의 얼굴에 정신을 뺏길 정도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아름다운 사람이 입을 열었다.

 

버려진 아이인가.”

 

 아름다운 이는 한숨을 쉬더니 늑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그의 충직한 하인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어린 아이올로스의 몸뚱이를 가볍게 들어 넓은 등에 태웠다. 폭신한 털가죽의 온기가 아이올로스에게 약간이나마 체력을 되찾아줬다. 그리고 어딘가로 가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아이올로스는 딱히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런 아름다운 사람의 먹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겨졌으므로.

 

 

 

 

 

 

 

 

 더 추워지기 전에 바람을 쐴 생각으로 성 밖으로 나온 뱀파이어 로드는 어린 소년을 주웠다. 아이에겐 저주가 걸려있었다. 미아의 저주. 그 저주에 걸린 사람은 저주를 건 사람이 지정한 장소에는 돌아가지 못한다. 말 그대로 사람을 버리기 위한 저주다. 그런 저주에 걸린데다 거의 죽어가는 상태의 아이를 보자, 로드는 어찌할지 고민했다. 그냥 버리고 가기엔 아이는 약해져 있어 얼마 버티지 못할테고, 그랬다가는 뒤가 찜찜할게 분명하다. 딱히 온정을 베풀 이유는 없지만 어린아이가 죽는걸 방치할 정도로 로드는 무자비한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로드는 아이를 자신의 성에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어느정도 자라 자신의 앞가림을 할 때가 되면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어비스로 인해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로드에게 있어, 아이가 자라는 몇 년 정도는 눈 깜빡하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다. 나중에 마을에 내려가 아이용 침대나 여러 자질구레한 물건을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로드는 헬베루즈의 등 위에 기절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 이후, 훤칠한 미남으로 성장한 아이올로스의 애정공세에 밀려 결국 연인이 되기까지 앞으로 십 년하고 조금 남은 미래를, 아직 로드는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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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오블] 팔 힘

[이터오블] | 2019. 11. 1. 13:06
Posted by 피넬

  이런, 내가 몇 번 셌는지 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셌던 숫자가 오십이었나? 난 한 두 번도 제대로 못 하고 바닥에 쓰러졌는데 이제야 땀이 흐를 정도라니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체력인지 모르겠다. 부러움이 섞인 한숨을 쉬며 앞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는 이터널을 바라보았다. 눈처럼 새하얗고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상의도 벗은 채 본격적으로 체력단련을 하는 이터널의 모습은, 건강한 육체미의 표본이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남녀노소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한 단정한 얼굴. 차갑지만 폭신한 눈을 연상하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또래보다 한 뼘은 큰 키. 오래 함께 지낸 사이인 내가 봐도 이터널은 미인이라 생각한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번 돌아보는 게 이상하지 않은 외모다. 얼마 전에는 잠깐 거처로 삼았던 마을에선 마을 주민인 듯한 꽤 덩치 큰 남자가 화려한 꽃다발을 이터널에게 건네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이터널은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꽃다발을 거절했지만 남자는 꽤 고집불통인 모양이었다. 고백이니 연애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선 모른 척 자리를 떠나는 것이 예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들키지 않게 슬쩍 자리를 피하려 했는데 남들보다 내 기척에 배는 예민한 이터널이랑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터널의 표정이 싹 가시더니 나에게 서둘러 달려와 ‘오해야.’라며 내 팔을 잡았다. 대체 뭐가 오해라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 발길 드문 길에서 꽃다발을 건네주는 모습을 보면 일단 피해 주는 게 도리 아닌가? 자긴 분명히 거절하고 있다는 이터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봤다. 고개를 들자 이터널에게 꽃다발을 주려던 남자는 자길 무시하는 거냐며 영문모를 소리를 해댔고, 결과 화가 난 이터널의 주먹에 명치를 가격당하며 나가떨어졌다.

  평소 실용성을 중시해 늘 여러 겹으로 된 옷에 가려져서 가늘게 보일 뿐이지, 한 꺼풀 벗겨보면 이터널의 육체는 상당히 단련된 몸이다. 마법사면서도 육체파인 마법사. 원소를 조작해 신비를 일으켜 상대를 공격하는 나와 달리, 이터널은 자신의 마력으로 얼음을 가공해 신비를 일으킴과 동시에 무기를 만들어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이른바 무투파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끔 이터널의 얼굴만 보고 건들거리며 다가온 양아치들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일을 보는 건 부지기수다. 어디서 들었던 ‘갭 모에’라는 단어를 이럴 때 사용하는 건가?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이터널의 체력과 근력이 조금 부럽다는 말이다. 특히 팔 굽혀 펴기를 몇십 번이나 하는 체력과, 사과 정도는 한 손으로 가볍게 뭉개버리는 완력이 부러웠다.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것보다 책 읽기를 더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하루의 절반을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고, 먹는 거에도 취미가 없어 필요한 영양소 정도만 섭취하다 보니 슬슬 나 자신도 체력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깡마른 내 몸을 본 이터널이 기겁하며 억지로 운동을 시킨 지 몇 달. 매일매일 운동을 꾸준히 한 덕에 기초체력은 나름 붙었으나 고민이 생겼다. 이상할 정도로 완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손아귀부터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운동은 익숙해지면 어느 정도 성과가 나왔으나 팔 굽혀 펴기나 철봉 매달리기, 턱걸이 등등, 팔의 힘이 중요한 운동은 도저히 무리였다. 나름 운동으로 자신이 붙었는데 턱걸이를 한 개도 하지 못했을 때의 기분이란... 분명 절망이라는 감정이 틀림없다. 며칠 전에는 사과를 깎아 먹으려다 손에 힘을 잘못 줘서 손가락을 베는 바람에 이터널이 기겁하며 치료해 준 적도 있었다.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완력이 평균치보다 모자랄 뿐이지, 일상생활에 크게 문제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목표였던 기초체력 늘리기엔 성공했으니 목표도 달성했다. 그렇게 납득하며 잠시 땀을 닦고 있는 이터널을 바라보자, 이터널은 웃으며 자기 등을 가리켰다. 등에 타란 의미겠지. 별말 없이 이터널의 등에 올라타자 천천히 들썩이다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단순히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지만 은근히 이런 단순함이 재미있는 법이다. 대체 체력이 어떻게 되어먹은 괴물인 건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날 등에 태운 채 팔 굽혀 펴기를 하는 걸까.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자 이터널이 피식 웃으며 ‘왜? 멋있어?’ 하고 물었다. 그렇네. 사람 하나 등에 태웠는데도 딱히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계속 운동하는 모습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대단하고 멋있게 보이겠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자 이터널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고장 난 듯 계속 굳어있었다. 뭐지? 지쳐서 그런가?

하긴 오래 했으니 지칠 만도 하지. 그래서 이터널의 등에서 내려오려 하자 이터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뭐? ‘확실하게 체력을 붙이는 운동을 하자.’고? 뭔 소리야 그럼 지금까지 가르쳐 준건 뭐였는데? 응? ‘유연성도 기를 수 있고, 편히 할 수 있는 운동이야.’라니? 세상에 그런 만능 운동이 있었는데 안 가르쳐 준거야? 잠깐, 운동이면 여기서 하지 왜 침실로 가자는 건데? 잠깐, 팔목, 팔목 아파!! 놔!!

 

 

 

 

 

  며칠 뒤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앞으로 내 허리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최소 이터널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을 정도의 힘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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